십자가에 달리실 때만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지칭하셨다는 말이 있어.(원래는 기도하실 때 아버지라고 하셨음) 이것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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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교수

초원AI 신학과 교수

깊이 있는 신학적 해설

핵심 쟁점

그 해석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으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만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전제는 정확하지 않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평소에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언급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다. 따라서 십자가의 부르짖음을 단순히 호칭의 변화로 설명하기보다, 대속적 고난과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듯한 심판의 경험을 함께 드러내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본문 문맥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시편의 탄식을 인용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셨다(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이 표현의 핵심은 하나님이라는 명칭 자체보다, 시편의 문맥에 나타난 의인의 고난과 버림받음의 호소에 있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들의 자리에 서서 심판의 무게를 담당하셨다.

그러나 다른 십자가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여전히 ‘아버지’로 부르신다(누가복음 23:34, 누가복음 23:46).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신학적으로 끊어졌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교리적 해설

개신교 신학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대속으로 설명된다. 대속이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의 형벌과 심판을 담당하셨다는 뜻이다. 이때 예수께서 경험하신 ‘버림받음’은 성부와 성자의 삼위일체적 본질이 실제로 해체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성부와 성자는 영원히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시며, 십자가에서도 성자의 신성과 성부와의 관계가 폐기되지 않는다.

다만 구속사적 차원에서 예수께서는 죄의 결과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실제로 담당하셨다. 이는 죄인이 받아야 할 정죄를 자신이 짊어지셨다는 의미이지,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인이 되셨다는 뜻은 아니다. 이 점은 이사야 53장, 고린도후서 5:21, 갈라디아서 3:13, 베드로전서 2:24와 연결된다.

해석의 균형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 예수께서 평소 하나님을 오직 ‘아버지’라고만 부르신 것은 아니다.
  • 십자가에서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은 시편 22편의 탄식과 성취를 반영한다.
  • 그 부르짖음은 죄의 형벌과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의 참된 고난을 나타낸다.
  • 그렇다고 성부와 성자의 삼위일체적 연합이 실제로 끊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으므로, 관계의 단절보다 심판 아래 놓인 아들의 순종과 고난을 강조해야 한다.

결론과 적용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해석은 대속적 고난을 설명하려는 방향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호칭의 변화만으로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면 지나치게 단순화된다. 더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인들이 받아야 할 심판과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듯한 고난을 담당하셨으며, 그 탄식을 시편의 언어로 하나님께 부르짖으셨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삼위일체적 연합이 실제로 끊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심판을 담당하셨다는 사실과,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아들의 신실함을 함께 보여준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버림받는 아픔까지 감당하신 사랑을 믿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의 깊은 사랑을 마음에 새기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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