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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기・3분 소요
박상준 목사
오늘의 인도자
사도행전 21:10-11 (NKRV)>
바울이 세번째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가이샤라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예언의 은사가 있는 ‘아가보’를 만나게 됩니다. 아가보는 점을 보듯 거짓 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하는 자(행11:28)’였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처럼 동족에게 붙잡혀서 이방인들에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누가와 많은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권하였지만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행21:13)’ 그 고난의 길을 갈 것이고 죽기를 각오하였다며 울고 있는 동역자들을 달랬습니다. 바울이 고난의 길을 담대하게 선택한 것은 이 고난의 길이 바울의 죄 때문에 일어난 심판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리는 고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만날 때에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갈 것(행20:22)’을 예언하였습니다. 그것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한 길’이고 성령께서 동행하는 길이라면 비록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과 슬픔이 있을지라도, 그 길을 가겠다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뜻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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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실 때에 ‘성령에게 이끌리시어(눅4:1)’ 고난의 길을 가셨고, 바울 역시 그 고난의 길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켜야하는 회개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땅히 가야하는 영광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피하고 싶은 고난의 길이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주님의 길이라면 그 예언의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 초월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선택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인지, 그것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길인지 살펴보지 않고 그 일이 인간적으로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에 따라 결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이 ‘성령에 이끌린 길’이고, ‘성령에 매인’ 결정이라면 그 결정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동역자를 아끼는 마음에 고난의 길을 만류하는 착한 마음도 소중하지만 성령께서 동행하시는 길이라면 그 길의 끝에는 반드시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최후의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예언과 점은 어떻게 다른가요?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서야 하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서 주님을 선택한 결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에, 그 선택의 기준이 ‘좋음과 나쁨’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성령께서 동행하심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믿음으로 결단할 때에 주님께서 한 걸음 먼저 가져서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 그 발걸음 위에 평안과 기쁨이 함께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